태그 : 여성주의
2008/04/11 ‘빨치산 어머니’의 딸로 다시 살다 [1]
2008/01/13 인간의 역사와 성매매가 함께 시작했다라?
2007/09/17 문화일보 신정아씨 누드사진 전재에 경악하다
2007/09/08 나와 내가 만나 사랑에 빠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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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치인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신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번듯한 주류이며 정상적인 인간인지를 설명하려는 온갖 시도들로 점철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이성애가족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2MB 정부에서 저는 이미 소수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구요. ‘비정상’이라고 콕 집어 말씀하시기도 했으니, 제가 아니라고 부정할래야 할 수도 없게 되었네요.
이명박 대통령이 언젠가 “이미 나있는 길만을 놓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없는 길을 어떻게 내서 갈까를 생각하라”는 말을 했지요. “태산을 움직여 길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도전한다”가 좌우명이라고도 하고요. 이 시대가 암울하고 갑갑하긴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해보는 것도 신선한 여성운동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다시 또 나이브하게)생각해요.
# by | 2008/04/15 10:16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2)
| ‘빨치산 어머니’의 딸로 다시 살다 | |||||||||
| 전쟁과 여성의 삶, 묻어둔 이야기② | |||||||||
| [우리 사회는 아픈 전쟁의 상처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은 이를 겪어낸 사람들의 입으로 이야기되지 못했다. 가족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쟁의 경험은 침묵되었다. 특히 전쟁 속 여성들, 그리고 전쟁 후의 일상을 겪어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사자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다. 일다는 여성들의 기억 속의 전쟁과 그 후 삶의 이야기를 통해, 제대로 쓰여지지 못한 우리의 현대사를 비추어보고 전쟁과 여성, 전쟁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다가가 ‘군비’ 이야기를 꺼내는 69세의 여성, 얼핏 보기에도 박봉자(세례명 ‘노사리아’)씨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들 잊어버리고, 자기 삶 사는데 급급해” 당시의 기억을 꺼내려고도 하지 않지만, 박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지배했던 전쟁의 경험과 그 속에 희생된 사람들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왔다. 이제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끄집어내어, 전쟁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다. 빨치산의 딸 박봉자씨가 말하는 전쟁 “1948년에 여순사건이 터지고, 형사들이 장화 신은 발로 긴 칼을 차고 집안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유치장에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셨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되셨는지 몰라요. 할머니는 일년 간이나 밥을 해놓고 아버지를 기다리셨죠.” 당시 35살이었던 아버지 박세열씨의 소식은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구례 쪽으로 끌고 가 구덩이에 묻었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구속되던 때 만삭이었던 어머니는 이후 아들을 낳아 유치장에 가서 그 소식을 전했는데, 기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박봉자씨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남동생을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1949년 5월에 아기가 병이 나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남편은 잡혀가고 아들은 죽고.” 전쟁 당시 29살의 어머니 구복순씨는 여맹활동을 했다. 산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옷을 지어 입히는 등 일을 돕다가, 시부모와 어린 두 딸을 시골로 피신시키고 맏이인 박봉자씨를 데리고 입산했다.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이다. 12살이던 박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곳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산에서 생활했다. 10월 말경, 어머니는 상황이 “위험하다”며 딸을 남자들 손에 맡겨 다른 골짜기로 보냈다. 그것이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후 어머니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를 다룬 책이 나와서… 어머니와 같이 있었던 선생님들(박선애, 박순애씨)도 만나고. 89년인가 90년인가, 그 분들 통해서 알았지요.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사지를 절단 당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어요.” 삶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세 딸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설움은 지금까지도 박씨의 가슴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하숙생 들이는 집에서 밥 해주면서 살았는데. 야간이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등록금 7백 원이 없어 못 갔어요. 하숙집에서 노트 빌려다가 언니들 숙제 대신 해주면서 밤에 공부했어요.” 그러다 어느 개인병원에 심부름 일을 하러 들어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병원에서 간호 일을 배우게 됐다. 밤이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낮이면 병원의 궂은 일들을 하면서 10년을 일했다. “병원생활 하면서 죽으려 한 적도 두 번 있어요. 힘들고 고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서. 아, 또 눈물이 나네요.” 그래도 사랑을 주고 받았던,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존재가 박봉자씨의 삶을 지켜주었다. 병원에서 맺은 인연들, 원장님과 대모님, 박씨가 결혼할 때 기꺼이 신부의 가족이 되어주었던 환자들 등, 많은 이들이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박씨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자상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내겐 있어요. 딸만 셋 있어도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몰라요. 시골 살아도 당시 세상에 여자아이도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던 분, 그 기억 가지고 살았기에 나는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생들에겐 부모님에 대한 그런 기억조차 없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어린아이였던 두 여동생들의 삶은 더 힘겨웠을 것이라고 박씨는 생각한다. “막내는 부잣집 양딸로 보내졌는데, 내가 19살 때 경상도 포항에 가서 14살이던 동생을 데려왔어요. 공부는커녕 심부름만 시키고 있었죠. 그 애는 내가 데려와서 학교도 보내고 직장도 알아봐줬어요. 근데 둘째는 지금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 고생 많이 했죠, 동생도.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기도 하고. 지금 저에게 남은 과제가 둘째를 찾아보는 일이에요.” 지난 날의 서러움과 노여움을 다 풀어내지는 않았지만, 박봉자씨는 고향사람들과 인척들의 태도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당시엔 행여나 붙을까봐, 부모님 살아계실 땐 그렇게 잘해주더니, 빨갱이 가족이라고 해가 될 까봐” 도움 주는 이가 없었다. 박씨의 가족들을 “없는 집안인 셈” 쳤다. 우리 역사를 배우는 시간들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장기수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남부군>을 읽고서 어머니와 당시 친구였던 분들을 만났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분들과도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조금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봉자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당시 임실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지만, 진실규명을 신청한 유족들은 손에 꼽힌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압박을 받을지 모르니까” 덮어둔다는 것이다. 그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어 임실유족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3년, 남편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라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의 경우엔,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남부군>을 읽고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도 거기 있었다”고 말해줬다. “예전엔 명절 때마다 울었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막내가 엄마, 왜 우린 외갓집이 없어? 물을 때면 또 눈물이 났어요. 이제는 안 울죠. 우는 대신 이런 일을 하니까 위로가 됩니다.” 박봉자씨는 유족회 사무실에 가면 볼 수 있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 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라는 글귀를 소개했다. 시체도 발견하지 못하고 묻어드리지도 못한 부모님, 총알을 맞고 쓰러지던 숱한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진실을 덮어두고 모른 척 해온 우리 사회에 대해 그는 “이제 무서울 것 없이” 싸우겠다고 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에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죠. 전쟁이 어떤 것인지 교육하고, 다시는 겪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쟁 위협 없는 나라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도 전쟁을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
# by | 2008/04/11 16:53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1)
언론, 점입가경!
- 문화일보 신정아씨 누드사진 전재에 경악하다
2007년 9월 13일
서울여성의전화·언니네트워크·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연합

# by | 2007/09/17 12:08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0)
'날 사랑할줄 알아야 남도 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는게 뭘까.?
'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아름답게 꾸미고, 거울을 보며 가꾸는 게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절대 아니지.
나를 사랑하는 것. . .
내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 이건 특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애인의 지나친 스킨쉽에 대하여 '그가 싫어할까봐' 뿌리치지 못함에 대한 비판이 되겠다. 나의 싫음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는 나를 위해 그 '싫음'을 표현하고, 그에게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표현해야지. 그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좋고 싫은 감정도 이해해줄꺼야.
내 꿈이 무엇인지. 내가 추구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것.
그리고 내 꿈을 위해서라면, 주위환경이 나를 가로막을 지라도, 사랑하는 나를 위해 내 생각을 조리있게 주장할수 있는것,
- 엄마가 싫어할까봐, 친구들이 무시할까봐, 돈이 걱정되어.. 등등 많은 이유로 자신의 꿈은 정말 꿈으로만 내버려둔채 사회에 타협하고, 이러저러한 인습에 타협하고, 그저그렇게 억지로 살아가면, 그저 '먹기 위해 사는'인생이 아닌가? 그저 내 이상은 굳혀놓고 그저 배만 곯지 않게 하는 것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배부른 돼지를 택하라 ~
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정도.
나도 내 자신과 사랑에 빠진지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은 그저 몸에 너무 해로운 것 먹지 않고, 건강관리 쬐금! 하고, 다이어트 해서 이뻐지고, 얼굴화장 이쁘게 하는 것 등,..
머 이런게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했던듯하다.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기도...)
흡연자친구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그 사람 기분 상할까봐' 나 담배연기 싫다고 표현하지 못했고
대충 내가 자신보다 어려보인다고 판단한 뒤에 함부로 반말을 해대도 그저 존중하고 대우해줬다.
그동안 내 스스로 나를 타자화했고 비주류했다는 맥락에도 맞는듯?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속한 사회를 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걸음마중이지만 어쨋든
주체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단 생각이. 많이 든다.
여성 > 돈없는 여성 > 돈없고 장애를 가진 여성 (비주류의 1인자..)
남성 < 돈있는 남성 < 돈있고 빽있는 남성 < 돈있고 스스로 권력지닌 남성 (주류의 1인자!)
이 사회는 돈있고 권력있는, 그리고 남성들이 누릴것은 참 많은 세상이다.
성매매에 대해서 여성의 죄는 물어도 남성의 죄는 묻지 않고,
빵 한조각 훔친 가난한 이는 감방에서 5년 살다 나오고
수천억을 횡령한 이는 6개월 살다 나오고 게다가 병원 특실에서 치료받는 중이라며 안타깝고 슬픈 스토리의 뉴스를 만들어내지.
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밖에서 뛰어놀다 넘어져서 바지가 찢어진 '여자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같고. (얘이렇게천방지축이라어쩌니)
똑같은 경우의 '남자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경우는 정반대. (얘가씩씩하게잘노네)
뭐 어쨋든 이런식으로 나는 '여성'으로서 내가 원하는 놀이보다는 혼나지 않을,, 눈치보기를 더 많이 했고
그러면서 서서히 나를 사회의 주류가 아닌 타자로 만들어갔던것 같네.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보자구요 어서- 흣흣
# by | 2007/09/08 23:01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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