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여성주의

2MB시대에 여성주의자로 살아남기

<언니네>가 내 홈페이지 메인인데, 개학하면서는 생전 로그인을 못했다.ㅠ 메인에서 '저용량시대에 여성주의자로 살아남기'라는 주제로 글이 연재되는 걸 보면서 매번 '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다가 드뎌 오랜만에 로그인한 나...

언니네 스타일의 글을 좋아한다. 딱딱하거나 너무 문어체적이지도 않으면서 할말은 다 하는. 가볍고, 수다식으로 편하게 읽히면서도 필요한 내용 또한 은연중에 스며드는,

언니_ 라는 호칭 안에서 형성되는 따뜻한 자매애의 네트워크. 

한때 언니네에 블로그를 개설하려고 했으나(일명 '자방') 아무래도 가난한 단체라 자방을 열려면 돈을 쪼금 내야한단다.ㅠ
그래서 결국 맨날 구경만 하고 내 방은 만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종종 다른 언니들이 자방에서 풀어내는 하소연이나 하루 일과 속에 내 모습을 투영하고는 덩달아 분노하고 덩달아 눈물흘리고 덩달아 깔깔거렸다.  

최근 한동안 댑따 딱딱한 글, 문어체 글만 보다가 간만에 언니네 글을 보니 넘 좋다.

휴- 2MB시대에 여성주의자로 살아남기, 언니들과 함께라면 외롭지 않겠죵?  *ㅁ*
다음번 감자모임엔 꼭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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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특집 [2MB는 모자라]
[95호]함께라면 외롭지 않아
(몽 / 언니네트워크 액션나우팀 , canicular@hanmail.net)
지난 3월, 액션나우팀은 "앞으로 5년, 2MB로 살라고? -저용량시대에 여성주의자로 버티기-”라는 제목으로 감자모임 열었습니다. 연일 미디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고매하신 분의 넓고도 깊은 뜻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자리여서 그랬던 걸까요. 감자모임을 마치고 난 후 참가자분들의 표정은 뭐랄까요, 참… 다른 여느 감자모임 참가자분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땠냐구요?^^


…사실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요-_-;;; 하지만 현실인걸요. 아니나 다를까, 감자모임을 끝내고 난 후 액션나우팀원들은 하나같이 턱을 괴고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2MB 시대에 여성주의자인 우리는 왜 이렇게 여성운동의 앞날에 대해 답답함과 암담함을 느끼는 걸까요. 불도저 2MB 정부가 몰고 올 수많은 재앙들 때문에? 하지만 언제는 여성운동하면서 이 정도의 재앙을 걱정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요? 이 답답함을 이유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앞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어떤 이슈로 운동을 할 것인지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MB 시대의 만성 ‘답답증’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해보면 저는 제 자신을 ‘소수자’로 정의하는데 주저함이 없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아니, 소수자가 아니라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말이죠, 새삼스럽게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됩니다. 소수자라는 위치는 절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요. 나를 소수자로 인식하게 하는 특정한 맥락과 관계, 그 안에서 나는 소수자인 것이죠.

사실 정치인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신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번듯한 주류이며 정상적인 인간인지를 설명하려는 온갖 시도들로 점철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이성애가족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2MB 정부에서 저는 이미 소수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구요. ‘비정상’이라고 콕 집어 말씀하시기도 했으니, 제가 아니라고 부정할래야 할 수도 없게 되었네요.


문제는 노골적으로 보수화를 지향하는 2MB시대에 ‘‘진보는 분열하고 보수는 부패한다’는 속설(?)을 뛰어넘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가진 소수자로서의 다양한 위치를 어떻게 드러내고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연대라니, 한편으로는 진부한 문구이지만 또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지 발제자인 호빵님의 말처럼, 이명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아서 움직이는 우파들의 자발성 앞에서 여성주의자인 우리는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참가자 중 난새님이 지적한 것처럼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이 가시화되면 가시화될수록,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계층의 사람들 외에는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될 수도 있겠죠. 이명박 정권 하에서 억압받는 많은 소수자들이 분개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그래서 거대한 소수자들의 연대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추상적인 낙관만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바로 여기에 2MB 정권에서 우리의 운동을 전망할 때 생기는 갑갑증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정말로 우리가 내부의 차이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어떠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연대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가 왔다는 위기감 때문이죠. 지금까지 언니네트워크가 우리 스스로가 즐거운 방식으로 사회․제도적인 차별에 저항하고 여성주의적 문화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운동들을 해 왔고 그러한 방식이 다양한 여성들의 네트워킹에 유의미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다른 소수자 단위와 연대할 수 있는 판을 짤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는 시기인 듯 합니다. 이미 ‘반차별 공동행동’과 같은 연대단위를 통해서 그러한 고민들을 풀어내기 시작하고 있기도 하구요.

빨리 가로질러 갈 수 없다면 천천히 돌아서라도 간다

감자모임에서 많은 참석자분들의 암담함을 목격한 후 가슴이 아픈(=잔머리만 굴리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여성주의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치밀한 운동전략’을 당장은 모르겠다면, 2MB 정권에서 조심하거나 피해야 하는 운동방식은 뭘까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고 말이죠.

사실 이명박 정부의 패턴은 너무나 명확해요. 우선은 ‘호기롭게’ 정책을 ‘선포’합니다. 예를 들면 신혼부부에게 12만호의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운 것 처럼요(비혼여성은 집도 절도 없이 살아도 아웃오브안중). 동시에 비싼 주택가격 때문에 신혼부부들이 결혼출발에서부터 좌절하고 있다고 마구 ‘역정’을 내시죠. 그리고는 본인이 해결해주겠다며 ‘생색’을 내십니다. 세대 간 차별이다, 비혼 차별이다 좀 논란이 되는 것 같으면 그 다음 바로 은근슬쩍 ‘내빼기’ 기술을 선보이십니다. 12만호였던 주택 공약이 바로 5만호로 줄어들게 되고, 그것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숫자입니다. 언니네트워크가 비혼운동을 하면서 오~래전에 지적했던 문제점들을 말도 안되는 논란을 거치고 거쳐 깨닫고 계시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못해 안쓰러워요.

주택공약에서 볼 수 있듯이, 정권을 잡은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이명박 정부이긴 하지만 인수위 시절부터 둑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전시용 정책들을 보다보면 ‘반대(시위)만 하다가 5년 다 가겠구만’ 하는 예측을 하게 돼요. 여성주의 운동의 방향이 중앙정부 정책 중심의 운동으로 이동하고, 그러한 정책에 대한 대응하는 것만으로 여성주의자들의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게 되는 방식만큼 2MB 정권에서 위험한 함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니네트워크의 독자적인 성격의 다양한 운동들을 꾸준히 이어감과 동시에 2MB 정책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 함께 운동의 동력으로 모을 수 있는 방법 등은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로 풍성해질 수 있겠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언젠가 “이미 나있는 길만을 놓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없는 길을 어떻게 내서 갈까를 생각하라”는 말을 했지요. “태산을 움직여 길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도전한다”가 좌우명이라고도 하고요. 이 시대가 암울하고 갑갑하긴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해보는 것도 신선한 여성운동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다시 또 나이브하게)생각해요.

요즘은 앞으로 5년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할 것이다”는 한 감자모임 참가자분의 소감을 마음에 꽃은 채로 운동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 이미지는 홍유라님의 만화 ‘채널고정’을 편집한 것입니다.


*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co.kr) 2008년 4월 특집 '2mb는 모자라' 中

by 오디♪ | 2008/04/15 10:16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2)

‘빨치산 어머니’의 딸로 다시 살다

‘빨치산 어머니’의 딸로 다시 살다
전쟁과 여성의 삶, 묻어둔 이야기②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우리 사회는 아픈 전쟁의 상처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은 이를 겪어낸 사람들의 입으로 이야기되지 못했다. 가족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쟁의 경험은 침묵되었다. 특히 전쟁 속 여성들, 그리고 전쟁 후의 일상을 겪어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사자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다.

일다는 여성들의 기억 속의 전쟁과 그 후 삶의 이야기를 통해, 제대로 쓰여지지 못한 우리의 현대사를 비추어보고 전쟁과 여성, 전쟁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박봉자씨 (노사리아)
“군비를 줄이면 비싼 등록금 안내도 되지요.”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다가가 ‘군비’ 이야기를 꺼내는 69세의 여성, 얼핏 보기에도 박봉자(세례명 ‘노사리아’)씨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들 잊어버리고, 자기 삶 사는데 급급해” 당시의 기억을 꺼내려고도 하지 않지만, 박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지배했던 전쟁의 경험과 그 속에 희생된 사람들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왔다. 이제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끄집어내어, 전쟁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다.

빨치산의 딸 박봉자씨가 말하는 전쟁

“1948년에 여순사건이 터지고, 형사들이 장화 신은 발로 긴 칼을 차고 집안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유치장에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셨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되셨는지 몰라요. 할머니는 일년 간이나 밥을 해놓고 아버지를 기다리셨죠.”

당시 35살이었던 아버지 박세열씨의 소식은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구례 쪽으로 끌고 가 구덩이에 묻었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구속되던 때 만삭이었던 어머니는 이후 아들을 낳아 유치장에 가서 그 소식을 전했는데, 기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박봉자씨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남동생을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1949년 5월에 아기가 병이 나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남편은 잡혀가고 아들은 죽고.” 

전쟁 당시 29살의 어머니 구복순씨는 여맹활동을 했다. 산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옷을 지어 입히는 등 일을 돕다가, 시부모와 어린 두 딸을 시골로 피신시키고 맏이인 박봉자씨를 데리고 입산했다.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이다. 12살이던 박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곳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산에서 생활했다.

10월 말경, 어머니는 상황이 “위험하다”며 딸을 남자들 손에 맡겨 다른 골짜기로 보냈다. 그것이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후 어머니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를 다룬 책이 나와서… 어머니와 같이 있었던 선생님들(박선애, 박순애씨)도 만나고. 89년인가 90년인가, 그 분들 통해서 알았지요.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사지를 절단 당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어요.”

삶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세 딸들

▲ 어머니의 죽음을 기록한 시가 실린 시집을 보는 박봉자씨
아버지도 잃고 어머니도 잃고 고향집도 잃어버린 12살의 박봉자씨. 1952년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났지만, 가진 것이라곤 없는 막막한 삶이 놓여있었다. 함께 공부하던 다른 아이들은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그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학적부조차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설움은 지금까지도 박씨의 가슴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하숙생 들이는 집에서 밥 해주면서 살았는데. 야간이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등록금 7백 원이 없어 못 갔어요. 하숙집에서 노트 빌려다가 언니들 숙제 대신 해주면서 밤에 공부했어요.”

그러다 어느 개인병원에 심부름 일을 하러 들어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병원에서 간호 일을 배우게 됐다. 밤이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낮이면 병원의 궂은 일들을 하면서 10년을 일했다. “병원생활 하면서 죽으려 한 적도 두 번 있어요. 힘들고 고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서. 아, 또 눈물이 나네요.”

그래도 사랑을 주고 받았던,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존재가 박봉자씨의 삶을 지켜주었다. 병원에서 맺은 인연들, 원장님과 대모님, 박씨가 결혼할 때 기꺼이 신부의 가족이 되어주었던 환자들 등, 많은 이들이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박씨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자상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내겐 있어요. 딸만 셋 있어도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몰라요. 시골 살아도 당시 세상에 여자아이도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던 분, 그 기억 가지고 살았기에 나는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생들에겐 부모님에 대한 그런 기억조차 없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어린아이였던 두 여동생들의 삶은 더 힘겨웠을 것이라고 박씨는 생각한다.

“막내는 부잣집 양딸로 보내졌는데, 내가 19살 때 경상도 포항에 가서 14살이던 동생을 데려왔어요. 공부는커녕 심부름만 시키고 있었죠. 그 애는 내가 데려와서 학교도 보내고 직장도 알아봐줬어요. 근데 둘째는 지금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 고생 많이 했죠, 동생도.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기도 하고. 지금 저에게 남은 과제가 둘째를 찾아보는 일이에요.”

지난 날의 서러움과 노여움을 다 풀어내지는 않았지만, 박봉자씨는 고향사람들과 인척들의 태도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당시엔 행여나 붙을까봐, 부모님 살아계실 땐 그렇게 잘해주더니, 빨갱이 가족이라고 해가 될 까봐” 도움 주는 이가 없었다. 박씨의 가족들을 “없는 집안인 셈” 쳤다.

우리 역사를 배우는 시간들

▲ 2월 유족증언사례 발표회에서 이유정 변호사의 말을 경청하는 유족들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중년을 지나면서, 박봉자씨는 부모 잃은 아픔을 그저 한으로 삭히며 삶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 분들의 정신을 잇고” 싶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철저한 반공사회였지만, “우리가 죄인은 아닌데, 왜 내가 말 못하고 살았을까” 싶은 순간이 왔다.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장기수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남부군>을 읽고서 어머니와 당시 친구였던 분들을 만났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분들과도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조금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봉자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당시 임실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지만, 진실규명을 신청한 유족들은 손에 꼽힌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압박을 받을지 모르니까” 덮어둔다는 것이다.

그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어 임실유족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3년, 남편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라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의 경우엔,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남부군>을 읽고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도 거기 있었다”고 말해줬다.

“예전엔 명절 때마다 울었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막내가 엄마, 왜 우린 외갓집이 없어? 물을 때면 또 눈물이 났어요. 이제는 안 울죠. 우는 대신 이런 일을 하니까 위로가 됩니다.”

박봉자씨는 유족회 사무실에 가면 볼 수 있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 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라는 글귀를 소개했다. 시체도 발견하지 못하고 묻어드리지도 못한 부모님, 총알을 맞고 쓰러지던 숱한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진실을 덮어두고 모른 척 해온 우리 사회에 대해 그는 “이제 무서울 것 없이” 싸우겠다고 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에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죠. 전쟁이 어떤 것인지 교육하고, 다시는 겪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쟁 위협 없는 나라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도 전쟁을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해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도 4.3항쟁 진압출동명령이 떨어지자, 이를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10월 21일 대대적인 반군토벌에 나서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봉기에 가담한 이들뿐 아니라 이를 지지한 사람들, 그의 가족들, 좌익사상을 가진 자 등 민간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고 처형했다. 

by 오디♪ | 2008/04/11 16:53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1)

인간의 역사와 성매매가 함께 시작했다라?

 거 죄없는 역사마저 강간하는 것도 유분수다.

성행위야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했었겠지만, 성매매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다는 거짓말은 참기 힘들다. 더불어 역사라는 명제는 문자 이후를 얘기한다. 문자 이전은 역사가 아니라 선사에 가깝다.

 

창녀의 근원?

대부분의 남성우월중심자들이 얘기하듯, 창녀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몸을 판 것이 아니라, 원래 창녀는 사제였던 것이 정설이다. 신전을 지키는 신녀 정도 되는 존재다. 아주 옛날에도 신앙적으로 고귀한 성지순례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순례자들을 위한 신전에서의 도우미활동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물론 금전적인 관계가 아니라, 신앙의 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창녀의 기원은 전쟁상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전쟁으로 인한 남성들의 죽음은 자연히, 가사를 분담하는 여성들의 생계적 궁핍을 가져왔고, 노동에 취약한 여성들의 한계 - 당시에는 노동력이 중요한 생산수단 - 가 어쩔 수 없는 왜곡된 성매매를 발생하게 한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니 뭐니 어쩌니 하면서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건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결혼한 부부간의 외도는 저 프리섹스로 유명한 미국 본토의 보수들도 반기지 않는 일이다. 오죽하면, 이혼을 할 경우에도 바람피는 활동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의지로 결혼생활의 존속이 가능한데, 인간의 의지로 욕망의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웃긴 일이다.

 

인간의 근원적욕망이니 뭐니 하면서 법원도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가해와 피해정도에 따라 아주 미약한 범죄 정도로만 보고 있다. 선진국에서 왜 그렇게 성폭력에 대한 근절의지와 강력한 처벌을 하는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인신구속에 가까운 강간행위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다.

 
한결 (ranma12)

한토마 펌

by 오디♪ | 2008/01/13 23:58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0)

문화일보 신정아씨 누드사진 전재에 경악하다

언론, 점입가경!
- 문화일보 신정아씨 누드사진 전재에 경악하다


오늘 9월 13일자 문화일보 3면에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이 전재되었다. 문화일보 웹사이트는 방문자 폭주로 사이트가 다운되었다. 어떻게 문화일보가 특종이랍시고 사건과 전혀 무관한 개인의 나체 사진을 게재할 수 있는지 비판하는 기사도 채 올라오기 전에 사진이 합성인지 아닌지, 몸을 살펴보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생존자가 아닌 것 같다는 세심한 분석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

언론들,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고 싶은가.

학력위조를 권하는 사회풍토에 대한 비판과 자성으로 이어지던 애초의 사건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 그리고 그들의 관계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학력위조를 권하는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폭탄이고, 기사거리고, 어마어마한 장사거리가 되었다. 언론의 보도윤리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사라졌다. 이메일 아이디가 공개되고, 이메일 제목이 공개되고, 집의 거리가 계산되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기사화되었다. 사건의 본질을 짚어내는 것과 한참 거리가 먼 사적관계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난무한다. 그리고 오늘, 문화일보 누드사진 전재 기사에 이르렀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고 낙인찍힌 여성에게 사생활이 없다는 건 이미 한국사회에서 상식이 되었다. 특히 돈과 권력이 관련된 사건에서는 여성이 어떻게 그 자원들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어하며, 성을 매개로 돈과 권력에 접근했다고 결론짓는다. 사회적으로 뉴스가 된, 젊고 미모의, 권력과 부를 쥐었다고 간주되는 여성에 대해 모든 기자와 네티즌들이 판관이 되어 사생활을 분석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파헤치고, 욕설과 비난을 조금의 제한없이 쏟아낸다. 지금 주요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댓글 사이버 성폭력을 보라. 이에 경쟁적으로 기사와 자료를 제공하면서 황색 저널리즘의 잔치를 펴고 있는 언론사,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이 인권침해적인 취재 보도 무한경쟁이 정녕 국민의 알권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오늘의 문화일보 누드 전재 보도 사건을 인권의식의 실종,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 여성 인권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깊이 제고하기 바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한다.

- 문화일보는 해당 기사를 즉각 삭제하고 공식 사과하라
- 문화일보 관련기자와 편집진은 총사퇴하고 문화일보사는 폐간하라
-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호도하지 말라
- 언론은 불필요한 개인 사생활 취재를 일체 그만두라
- 여성 대상 사이버성폭력과 인권침해적 언어폭력에 대한 언론의 책임을 직시하라



2007년 9월 13일

서울여성의전화·언니네트워크·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연합


by 오디♪ | 2007/09/17 12:08 | 요놈의세상길! | 트랙백 | 덧글(0)

나와 내가 만나 사랑에 빠지면...♡

'날 사랑할줄 알아야 남도 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는게 뭘까.?

'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같이 아름답게 꾸미고, 거울을 보며 가꾸는 게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절대 아니지.


나를 사랑하는 것. . .
 
내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 이건 특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애인의 지나친 스킨쉽에 대하여 '그가 싫어할까봐' 뿌리치지 못함에 대한 비판이 되겠다. 나의 싫음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는 나를 위해 그 '싫음'을 표현하고, 그에게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표현해야지. 그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좋고 싫은 감정도 이해해줄꺼야.

내 꿈이 무엇인지. 내가 추구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것.
그리고 내 꿈을 위해서라면, 주위환경이 나를 가로막을 지라도, 사랑하는 나를 위해 내 생각을 조리있게 주장할수 있는것,
- 엄마가 싫어할까봐, 친구들이 무시할까봐, 돈이 걱정되어.. 등등 많은 이유로 자신의 꿈은 정말 꿈으로만 내버려둔채 사회에 타협하고, 이러저러한 인습에 타협하고, 그저그렇게 억지로 살아가면, 그저 '먹기 위해 사는'인생이 아닌가? 그저 내 이상은 굳혀놓고 그저 배만 곯지 않게 하는 것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배부른 돼지를 택하라 ~



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정도.

나도 내 자신과 사랑에 빠진지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은 그저 몸에 너무 해로운 것 먹지 않고, 건강관리 쬐금! 하고, 다이어트 해서 이뻐지고, 얼굴화장 이쁘게 하는 것 등,..
머 이런게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했던듯하다.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기도...)

흡연자친구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그 사람 기분 상할까봐' 나 담배연기 싫다고 표현하지 못했고
대충 내가 자신보다 어려보인다고 판단한 뒤에 함부로 반말을 해대도 그저 존중하고 대우해줬다.

그동안 내 스스로 나를 타자화했고 비주류했다는 맥락에도 맞는듯?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속한 사회를 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걸음마중이지만 어쨋든
주체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단 생각이. 많이 든다.


여성 > 돈없는 여성 > 돈없고 장애를 가진 여성 (비주류의 1인자..)
남성 < 돈있는 남성 < 돈있고 빽있는 남성 < 돈있고 스스로 권력지닌 남성 (주류의 1인자!)

이 사회는 돈있고 권력있는, 그리고 남성들이 누릴것은 참 많은 세상이다.

성매매에 대해서 여성의 죄는 물어도 남성의 죄는 묻지 않고, 
빵 한조각 훔친 가난한 이는 감방에서 5년 살다 나오고
수천억을 횡령한 이는 6개월 살다 나오고 게다가 병원 특실에서 치료받는 중이라며 안타깝고 슬픈 스토리의 뉴스를 만들어내지.

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밖에서 뛰어놀다 넘어져서 바지가 찢어진 '여자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같고. (얘이렇게천방지축이라어쩌니)
똑같은 경우의 '남자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경우는 정반대. (얘가씩씩하게잘노네)


뭐 어쨋든 이런식으로 나는 '여성'으로서 내가 원하는 놀이보다는 혼나지 않을,, 눈치보기를 더 많이 했고
그러면서 서서히 나를 사회의 주류가 아닌 타자로 만들어갔던것 같네.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보자구요 어서- 흣흣

by 오디♪ | 2007/09/08 23:01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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